늦게 온 소포.

2010. 12. 16. 13:28자유게시판/자유게시판

 

늦게 온 소포

 

                          고 두현(1963~ )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을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대 묶여 도착한 어머님 안부
남쪽 섬 먼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한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에 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보낸 소포끈 찬찬히 풀다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에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짝 헤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듯 얼굴 내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댓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들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우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이 하얗게 녹고있었다

 

맞춤법이 틀린 편지가 우둘투둘 얽은 유자 껍질 모양이다.

돌멩이처럼 투박한 그 껍질 속에서 고단한 서울살이를 다독이는 향이 흘러나온다.

고향집 처마 아래 켜둔 알등 같다. <손택수·시인>

 

- 2010.12.16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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